본문 바로가기

진리실험/동양철학

애착 없는 존재 - 몸과 인문학(7)

『몸에서 자연으로, 마음에서 우주로 』
with 동의보감 & 숫타니파타 
고미숙 저 북튜브 2021년 11월

 

생명의 본질을 탐구하다

모든 인간은 자기 몸을 탐구해야 한다. 살아 있는 몸, 숨 쉬는 몸, 존재하는 몸. 몸이란 육체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세계이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우주이다. 동의보감은 바로 이 살아 있는 신체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탐구로 시작한다.

보통 해부학이라 하면 죽은 몸을 해부하여 내부 구조를 밝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동의보감은 그와는 결이 다르다. 살아 있는 몸, 즉 생명 그 자체를 해석하는 학문이다. 동의보감의 신형장부도는 해부도가 아니다. 그것은 호흡하고 움직이며 생기를 머금고 있다.

그 몸이 앉아 있다. 눈을 뜨고 있으며, 숨을 쉬고 있다. 배꼽은 오르내리며 기(氣)가 순환한다. 배꼽은 신체의 중심이 아니라, 생명 에너지가 출입하는 문이다. 살아 있는 몸을 그리는 것, 그것은 곧 생명도를 그리는 것이다. 우리는 이 신체도를 통해 생명력을 관찰하고, 존재의 본질을 탐구한다. 동의보감은 몸을 죽은 대상으로 두지 않는다. 오히려 살아 있는 신체의 움직임과 기운을 이해하고, 그것을 조화롭게 유지하는 길을 탐색한다.

몸을 아는 것은 곧 삶을 아는 것이다. 우리 몸을 탐구하는 일은 건강 관리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 존재의 원리를 파악하는 일이자, 삶을 살아가는 방식 자체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의보감은 의학서가 아니라,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묻는 철학서이기도 하다.

이와 대조적으로 붓다의 고행상은 극한의 신체적 고통을 보여준다. 6년 동안 그는 하루에 좁쌀 한 톨, 콩 한 알만을 먹으며 자신을 한계까지 밀어붙였다. 육체의 모든 욕망과 필요를 배제하며 도를 구한 모습.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 마른 뼈와 피부, 움푹 팬 배, 그러나 그 속에서도 살아 있는 눈빛. 이는 고행이 아니라 정신의 힘을 드러내는 상징이다.

사람들은 흔히 고통 속에서 정신이 약해질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붓다는 정반대의 길을 보여준다. 육체가 한계에 다다를수록 정신은 더욱 또렷해진다. 극한의 기아 속에서도 그의 자세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허리는 꼿꼿하고, 손은 무릎 위에서 단단히 정좌하고 있다. 마치 모든 것을 넘어선 듯한 형상이다.

이것이야말로 불상이 가진 역설적인 의미다. 불상은 경배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의지와 정신의 극한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고행을 통해 육체는 무너져가지만, 그 속에서 정신은 더욱 단단해진다. 불상이 바라보는 그 깊은 눈빛 속에서 우리는 육체와 정신, 생과 사, 한계를 넘어선 존재의 가능성을 보게 된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본래 불교에는 불상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붓다는 자신을 따르지 말고 다르마, 즉 법을 따르라고 말했다. 법을 의지하고 자신을 돌아보는 것, 그것이 수행자의 길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불교가 간다라 지역으로 전파되었고, 헬레니즘 문화와 만나면서 불상이 탄생했다.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 원정 이후, 그리스 조각술의 영향을 받은 불상이 하나둘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불교는 부처의 형상을 직접 조각하지 않았다. 대신 법륜(法輪), 보리수, 빈 좌석과 같은 상징물을 통해 붓다를 기렸다. 그런데 간다라에서는 인간의 형상으로 불교의 가르침을 전달하는 방식이 자리 잡았다. 이로써 불상은 철저히 수행의 대상이 아닌 신앙의 대상으로 바뀌었다.

대승불교의 확산과 함께 불상의 역할도 점차 커졌다. 경전을 읽고 수행하는 것보다, 불상 앞에서 기도를 드리고 공양을 올리는 문화가 발전했다. 그렇게 불상은 조각이 아니라, 불교의 역사와 수행 방식을 바꿔놓은 상징이 되었다. 지금은 사찰에 가면 수많은 불상이 있지만, 정작 선방에서는 형상을 두지 않는다. 선(禪)의 세계에서는 모든 형상이 집착을 낳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상을 없애는 것이 불교의 본질이라면, 불상이란 무엇인가? 이를 통해 우리는 불교가 무엇을 지향하는 종교인지 다시 묻게 된다.

그렇다면 신체와 정신의 관계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동의보감에서는 이를 ‘양생’으로 설명한다. 양생이란 건강법이 아니라 생명을 기르고 보호하며, 인간을 보다 자유로운 존재로 나아가게 하는 실천이다. 생명을 기르면 진인(眞人), 즉 신선이 될 수 있다. 신선이 된다는 것은 장수를 넘어, 생사의 구속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존재로 변모하는 것이다. 이때의 자유란 무엇인가? 육체적 건강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다. 몸이 가볍고 경쾌할 때 우리는 일상에서도 자유를 느낀다. 중력에 의해 땅에 묶여 있지만, 정신은 하늘을 꿈꾼다. 이처럼 동의보감에서는 몸의 기운이 청정해지면 가벼워진다고 본다. 기운이 탁하고 몸이 무거우면, 존재 자체가 힘겨워지고 감각이 둔해지지만, 기운이 맑고 가벼우면 의식은 자연스럽게 상승한다. 이는 곧 하늘로 오른다는 상징적 의미로도 해석된다. 동양에서 말하는 ‘우화등선(羽化登仙)’이란 바로 그러한 상태를 의미한다. 신체적 건강을 넘어 영적 경지를 향하는 과정, 그것이야말로 동의보감이 궁극적으로 제시하는 양생의 길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죽음 이후의 세계관에도 반영된다. 티베트에서는 천장(天葬)을 한다. 시신을 새들에게 맡겨 하늘로 보내는 의식이다.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숙련된 사람이 시신을 절단하여 새가 먹기 좋도록 준비하는 과정을 거친다. 그들이 신체를 조각내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개인의 몸이 아닌 자연의 일부가 된다. 이는 장례 방식이 아니라, 죽음을 삶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보는 철학적 태도에서 비롯된다.

이는 혼이 새를 타고 하늘로 간다는 믿음에서 시작되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자연의 이치에 따라 하늘로 흩어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티베트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기보다, 마지막까지 존재의 무게를 덜어내고 가벼운 상태로 떠나기를 바란다. 몸은 흙으로 돌아가지만, 혼은 하늘로 가야 한다. 그러나 혼이 가벼워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생전에 집착을 내려놓고, 불필요한 욕망과 감정을 비워야 한다. 삶을 가볍게 살수록, 죽음도 가벼워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지막 순간, 새의 날개를 타고 자유롭게 하늘로 떠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해탈이 아닐까?

바로 집착을 내려놓아야 한다. 무거운 감정, 욕망, 애착을 덜어낼 때 혼은 가벼워지고 자유로워질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말처럼 쉬운 일인가?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온갖 관계 속에서 무수한 인연을 맺고, 그 인연은 무거운 정과 한(恨)으로 쌓이기 마련이다. 가족, 친구, 사랑, 일에 대한 집착이 얽히고설켜 무겁게 내려앉을 때 우리는 쉽게 피로를 느낀다. 그렇기에 이 집착을 조금씩 덜어내는 연습이 필요하다.

동의보감이 말하는 양생, 그리고 붓다가 보여준 정신의 힘. 이 둘은 서로 다른 듯하지만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다. 동의보감은 건강한 몸을 통해 기운을 맑히는 법을 가르치고, 붓다는 고행을 통해 정신을 초월하는 법을 보여준다. 몸과 마음의 균형을 맞추고, 불필요한 것들을 덜어내어 본연의 가벼움을 회복하는 것. 살아 있는 몸을 탐구하고, 그 몸이 어떻게 하면 더 가볍고 자유로워질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 그것이 곧 인간 존재의 탐구이다. 궁극적으로 가벼운 존재가 된다는 것은 무게를 덜어내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가다듬고 본질에 집중하는 과정이다. 몸과 마음이 무거울수록 우리는 더 많은 것을 놓치고 만다. 그러니 더 가볍게, 더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삶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닐까?

동의보감에서 말하는 신형장부도는 해부도가 아니다. 배꼽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은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이다. 배꼽을 바라보며 호흡하는 것은 인간이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기본적인 동작이다. 살아 있는 신체를 탐구하는 것, 그것이 곧 동의보감이 제안하는 생명학이다. 배꼽을 중심으로 한 호흡법은 생리적 현상이 아니라, 기(氣)의 순환과 직결된다. 배꼽 아래 단전에 기운을 모으고,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으면 몸과 마음이 안정된다. 이는 호흡이 아니라 생명의 리듬을 조율하는 중요한 과정이다.

반면 붓다의 고행상은 고통 속에서도 정신이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모습이다. 몸은 마르고, 살은 빠지고, 뼈가 도드라져 있지만, 눈빛은 살아 있다. 그 눈빛은 생존 본능이 아니라, 정신의 맑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붓다는 자신의 몸을 극한까지 몰아넣으면서도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허리는 곧고, 시선은 분명하며, 손과 다리는 균형을 유지한다. 이는 정신이 신체를 초월하는 순간을 보여주는 것이다. 몸은 부서질 듯하지만, 정신이 살아 있다면 몸 또한 견딜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생명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성찰이 아닐까? 몸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정신이 변하고, 정신이 단련되면 몸도 그에 응답한다. 살아 있는 신체를 잘 가꾸면 정신도 맑아진다. 반대로 정신이 살아 있으면 몸의 고통을 초월할 수도 있다. 몸과 정신은 하나이며, 그 조화를 이루는 것이 진정한 삶의 비결일 것이다.

이처럼 동의보감과 불교, 특히 숫타니파타의 가르침은 몸과 정신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준다. 인간은 땅에 발을 딛고 있으면서도 늘 하늘을 동경한다. 몸은 무겁지만 정신은 가벼움을 추구한다. 호흡을 가다듬고, 마음을 맑게 하며, 온몸의 기운을 가볍게 하는 것. 그것이 곧 양생의 길이며, 붓다가 찾은 자유의 길이다. 그렇다면 몸과 마음을 가볍게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식습관을 조절하고, 몸을 단련하는 것이 전부일까? 아니면 마음의 집착을 끊고, 불필요한 욕망을 덜어내는 것이 핵심일까? 몸이 자유롭다면 정신도 자유로울 것이고, 정신이 해방된다면 몸 또한 그 무거운 굴레를 벗어날 것이다. , 가벼워진다는 것은 신체적 경쾌함이 아니라, 존재의 무게를 줄여가는 과정이다. 우리 삶의 무거운 짐을 하나씩 내려놓을 때, 그때야말로 진정한 자유가 다가오지 않을까?

계절의 영혼

혼이란 무엇일까? 이 질문을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다면, 이제 한번쯤 고민해볼 때다. 우리는 몸의 무게와 숫자에 집착하지만, 혼의 무게에 대해서는 좀처럼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예로부터 많은 이들이 세속적 욕망이 많으면 혼이 무거워지고, 원한과 미련이 많으면 쉽게 떠나지 못한다고 믿어왔다.

혼이 무겁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지나치게 얽매인 삶, 놓지 못하는 욕망과 집착이 많을수록 그 혼은 무겁고 무거워져 떠나는 길이 멀어진다. 반대로, 욕망에서 자유롭고, 미련을 정리한 혼은 가벼워져 휘익 하고 날아간다. 죽음을 맞이할 때 우리가 바라는 것은 단 하나다. 남은 자들의 애도 속에서 망자는 툴툴 털고 훌훌 떠나 자유로운 경지에 이르기를. 그것이야말로 망자에 대한 진정한 예의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무게는 어디서 비롯될까? 한평생 채우려 했던 것들, 손에서 놓지 못한 것들, 한껏 움켜쥐었던 모든 것이 우리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재물, 명예, 관계까지 모든 것이 무게가 된다. 살아있을 때는 힘겹게 짊어진 채 걷지만, 죽음 앞에서야 그 무게를 내려놓고 싶어도 쉽지 않다. 그러니 살아있는 동안 가벼워지는 법을 배워야 한다. 조금 덜 소유하고, 덜 집착하고, 덜 염려하며 살아야 한다.

삶은 무게를 덜어가는 과정이다. 가진 것이 많아야 행복할 것 같지만, 막상 떠날 때는 가진 것이 없는 자가 가장 가볍게 떠난다. 우리가 남겨진 이들을 향해 ‘편히 가라’고 말할 때, 진정으로 그를 놓아줄 수 있는가? 그것은 말이 아니라 실천이어야 한다. 남은 자도 집착을 내려놓아야 하고, 떠나는 자도 미련을 남기지 않아야 한다. 그렇게 서로를 놓아줄 수 있을 때, 혼은 가벼워지고 자유롭게 떠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우리는 떠난 이를 붙잡고 ‘한 번이라도 얼굴을 보고 싶다’고 외친다. 하지만 만약 그 망자가 진짜로 다시 살아 돌아온다면? 아마 기절할 것이다. 과연 우리가 바라는 것은 진정한 재회일까, 아니면 채우지 못한 감정을 스스로 위로하고 싶은 것일까? , 그것은 순수한 애도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결핍과 상실감에서 비롯된 감정이다.

망자가 자유로이 떠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진정한 배웅이다. 이를 위해서는 죽음을 끝이 아니라 새로운 변환의 과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물질적인 육체가 사라진다고 해서 존재 자체가 소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흔히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정작 두려운 것은 남겨진 우리가 품은 미련과 후회 아닐까? 죽은 자를 떠나보내지 못하는 것은 산 자가 자신을 위한 감정을 정리하지 못한 탓이다.

이는 종교적 관점이 아니라 자연철학적으로도 설명될 수 있다. 혼은 본래 ‘양’의 성질을 지니므로 가볍고 경쾌하게 상승한다. 하지만 생전에 쌓인 집착과 애착이 많다면 그 혼은 쉽게 떠나지 못하고 이승을 맴돌게 된다. 살아 있는 동안 애착을 줄이고, 미련을 덜어내는 연습을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죽음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준비가 아닐까? 그러니 지나친 애착은 죽은 자뿐만 아니라 산 자의 자유까지 가로막는 무거운 짐이 된다.

죽음을 맞이할 때 애착을 내려놓아야 한다면, 살아있는 동안에도 애착을 줄이는 연습을 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애착을 갖도록 길들여진다. 물건, 관계, 신념, 심지어 자신에 대한 집착까지. 모든 것이 나의 일부라고 착각하며 쥐고 있는 순간, 그것이 곧 무게가 된다. 그런데 죽음을 앞두고 그 무게를 쉽게 내려놓을 수 있을까? 살아있는 동안 무겁게 짊어지고 다녔던 것들이 갑자기 가벼워질 리 없다.

이것이 죽은 후에도 우리를 ‘구천’을 맴돌게 한다. 애착이란 , 이승과 저승을 가로막는 벽이 된다. 사랑하는 이를 놓지 못해 떠돌고, 잃어버린 부를 그리워하며 미련을 남긴다. 쇼핑에 대한 집착이 강했던 사람이 죽어서도 백화점을 떠나지 못하는 유령이 된다면? 실제로 유령 전설에는 생전의 욕망을 채우지 못해 떠돌게 된 혼령들이 많다. 생전에 끊임없이 예쁜 옷을 사 모으던 사람이 죽어서도 거울 앞에서 한없이 몸을 비추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삶과 죽음이 구별되지 않는 비극이 아닐까?

애착이란 소유에 대한 집착만이 아니다. 관계에 대한 집착도 마찬가지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나면, ‘조금만 더 함께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애초에 관계란 흐르는 것, 변하는 것이고,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 자유로 가는 길이다. ‘너 없이 나는 살 수 없어’라는 말은 , 내 삶을 타인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 그러니 애착을 버리지 못한 채 떠나지 못한 혼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방황하게 된다. 떠나는 자도, 남겨진 자도 가벼워지는 연습을 해야 한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삶도, 죽음도 온전히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요절과 장수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요절은 짧은 생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의 삶이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순환을 따른다면, 요절은 그 계절을 다 겪지 못한 상태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봄과 여름만을 집착하며 늙어도 어린 마음가짐으로 살아간다면, 그것도 일종의 요절이 아닐까?

반대로, 나이가 적어도 인생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다 경험했다면, 그는 결코 요절한 것이 아니다. 이는 연령의 문제가 아니라, 삶을 어떤 태도로 살아왔느냐에 달려 있다. 순간을 충실히 살고, 삶의 의미를 깨달으며, 인연을 소중히 여기면서도 집착하지 않는 이에게는 시간의 길고 짧음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삶을 깊이 있게 산 이에게는 하루도 백 년과 같고, 아무런 깨달음 없이 흘려보낸 시간은 백 년도 하루와 같다.

현대인은 수치적 연령에 집착하지만, 진정한 장수란 자연의 흐름을 따라가는 삶에서 비롯된다. 생의 리듬을 이해하고, 봄에는 봄의 역할을, 여름에는 여름의 역할을 수행하며, 가을에는 성숙을, 겨울에는 마무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 그렇다면 장수란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을 조화롭게 완성해 가는 과정이다. 긴 생을 살면서도 계절을 놓치고, 성장을 회피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요절이 아닐까? 반면 짧은 생이라도 완숙한 삶을 살아낸다면 그는 이미 충분히 자신의 생을 마친 것이 아닐까?

125세라는 수명이 가능할까? 오래 사는 것만이 장수는 아니다. 동양 철학에서는 오행의 순환에 따라 25년씩 성장하여 125세까지 사는 것이 이상적이라 했다. 하지만 장수가 아니라, 가벼워지고 자유로워지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신선이 되기 위한 과정과 맞닿아 있다.

신선이 되기 전의 상태를 ‘진인(眞人)’이라 하며, 동의보감 같은 고전에는 이들의 양생법이 가득하다. ‘진인’이란 오래 사는 사람이 아니라, 삶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육체와 정신을 동시에 단련하여 무게를 덜어낸 존재다. 가벼워진다는 것은 몸이 날렵해지는 것이 아니라, 욕망과 집착을 줄이고, 불필요한 것들에서 자유로워지는 과정이다.

장수란 무엇인가? 수명이 길다는 것이 아니라, 그 긴 세월을 어떻게 보내느냐가 중요하다. 백 세를 넘긴다 한들, 물질적 욕망과 집착 속에 허우적거린다면 그것이 진정한 장수일까? 오히려 생을 가볍게 살아가는 이가 비록 짧은 생을 살았더라도, 그가 더 깊고 넓게 삶을 누린 것이 아닐까?

그러니 장수를 원한다면, 먼저 삶을 가볍게 만들어야 한다. 욕망을 줄이고, 불필요한 것들을 덜어내고, 자연의 순리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장수의 길이 아닐까?

그렇다면 불교에서 말하는 삶이란 무엇일까? 불교는 ‘삶은 괴로움이다’라고 선언한다. 이는 비관이 아니라, 인간이 노병사의 과정을 거치며 겪는 고통을 직시하는 태도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상실과 변화, 육체적 한계와 관계의 무상함은 필연적이며, 이를 부정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괴로움이 된다.

붓다는 원래 시타르타 왕자로 태어났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으나, 그것이 인간 존재의 근원적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않았다. 왕궁 안에서 철저히 보호받던 그는 어느 날 성 밖에서 늙고 병든 자, 죽음을 맞이한 자를 보았다. 그 순간 깨달았다. ‘아, 이 모든 것은 나에게도 닥칠 일이다!’ 그는 연민이 아니라, 존재의 근본적인 한계를 마주했다. 이를 피해 살 수 없다면, 그 괴로움의 본질을 탐구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출가했다. 그리고 고행했다. 한때는 극한의 금욕을 실천하며 몸을 쇠약하게 했고, 다른 한때는 깊은 명상 속에서 마음을 갈고닦았다. 그리고 그는 중도의 길을 깨달았다. 극단적인 금욕도, 쾌락의 탐닉도 아닌 자연의 흐름을 따르는 길. 그렇게 그는 괴로움의 본질을 직시하며, 거기에서 자유로워지는 길을 찾았다.

그 과정에서 그는 선언한다. ‘일체개고(一切皆苦).’ 하지만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내가 마땅히 편안히 하리라(我當安之).’ 괴로움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 끝이 아니다. 그 괴로움을 넘어서 평온함에 이르는 것이 목표다. 그것이야말로 불교가 추구하는 깨달음이다.

붓다는 신화적 존재가 아니다. 그는 인간으로 태어나, 출가하고, 수행하고, 깨달음을 얻었다. 삶의 괴로움을 직시하고 그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을 찾은 사람이다. 왕자의 신분을 버리고 스스로 구도의 길에 나선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는 부와 권력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 문제를 탐구하기 위해 기존의 삶을 완전히 떠나는 결단이었다.

그는 철저하게 수행했다. 극한의 고행을 거듭했으며, 육체를 소진하는 과정 속에서 깨달았다. 고통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고통 그 자체를 직시해야 한다는 것. 그래서 그는 중도를 선택했다. 극단적인 쾌락도, 극단적인 금욕도 아닌, 자연의 흐름에 조화롭게 따르는 길. 이 과정에서 그는 깨달았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존귀한 존재이며, 그 존귀함을 스스로 깨닫지 못할 때, 삶은 끝없는 괴로움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붓다는 신도 아니고, 영원히 살 수도 없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삶과 죽음의 구조를 통찰하며, 삶이란 곧 변화의 연속이며, 변화 자체가 진정한 자유로 향하는 길임을 깨달았다. 자신의 생을 깊이 이해하고, 흐름을 받아들이는 순간, 삶과 죽음의 경계는 흐려진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 있는 동안에도 무겁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것. 집착을 덜어내고, 인연을 정리하고, 본연의 가벼움을 되찾는 것. 그리고 마지막 순간, 망자가 자유롭게 떠날 수 있도록 배웅할 수 있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삶이 아닐까?

반응형